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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준, 비운에 굴하지 않은 야구천재Monologue/sport 2007. 3. 9.개인적으로, 박노준이 해설하는 야구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그것 때문에 채널을 돌린다든가 하는 것까지야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는 분명 경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해설 내용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음색이나 억양이 거슬려서도 아니다. 그저, 그것이 박노준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치게 매끈하고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마음 속 흑백필름으로 간직된 어느 신비한 영웅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바로 이십 수년 전, 고등학생 시절의 그, 박노준 말이다.
'독일병정'. 선린상고 시절, 박노준의 별명이었다. 날렵한 얼굴선에 강인하게 각진 콧날, 그리고 깊숙이 눌러쓴 헬멧 챙이 콧등까지 길게 드리운 그늘 밑에서 날카롭게 빛나던 두 눈으로 마운드를 노려보다가, 상대 투수가 선동열이든 누구든 상관없다는 듯 시원스럽게 방망이를 휘둘러 훌쩍 오른쪽 담장 너머로 결승홈런을 날려놓고도 미소조차 머금지 않던 비장함.
그리고 바뀐 회에 상대팀이 추격을 시작하면 멀찍이 외야로부터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운드로 달려 나와 연속삼진으로 기를 꺾어놓고는, 다시 하이파이브 한 번 없이 덕아웃으로 달려 들어가던 그 풋풋함.
지금은 해설자로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박노준은 야구선수였다. 그것도 그냥 야구선수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야구선수였으며, 또한 그저 특별한 야구선수였던 것이 아니라 한 세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야구를 시작한 이래, 그는 항상 최고였다. 투수로서, 타자로서, 다시 야수로서, 주자로서 '얄밉도록 잘 한다'는 말의 뜻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 그였다. 그는 각 연령별 국가대표명단의 붙박이였고, 리틀야구 시절 그 때만 해도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여기던 대만을 상대로 국제경기 첫 승리를 이끌어냈던 것을 시작으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에 이르기까지 한국야구가 국제무대에서 거둔 성과의 곳곳에 이름을 남겨놓았다.
고교 야구의 전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고교야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고교야구경기가 벌어지는 동대문야구장에는 날마다 학생과 동문, 그리고 그 학교가 있는 지방 출신들이 간만에 모여 정겨운 사투리를 섞으며 작은 축제판을 벌이곤 했다.
야구와 함께 양대 인기종목으로 꼽히는 축구에 대한 관심이 그때 역시 국가대표팀 경기에만 쏠려있었던 것과 달리, 고교팀을 중심으로 지역간 대결구도로 벌어지던 야구가 한 해 먼저 프로화 되고, 또 한참 먼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박노준은 선린상고에 진학했던 1979년, 또 하나의 초고교급 투수 3학년생 윤학길이 이끄는 부산상고를 상대로 결승전 15-1 대승을 이끌어내며 1학년생으로서 MVP에 뽑히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2학년 때는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2연패를 이끌어내며 최우수선수와 우수투수상을 휩쓸었다.
특히 1980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은 야구천재 박노준이 올라선 정점이었다. 그 경기에서 맞선 팀은 광주일고였고, 그 팀의 기둥투수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공의 소유자 선동열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박노준은 그 한 수 위였다.
선동열이 이십 년이 넘도록 잊지 못한다는 그 날, 선동열 상대 4타수 3안타, 3타점. 그리고 결승 투런 홈런. 그뿐인가, 자신이 만든 결승점을 지키기 위해 마무리로 등판, 4.2이닝동안 1점만 내주고 삼진 8개를 뺏으며 박노준은 온전히 혼자 힘으로 우승을 만들어냈다. 앞선 청룡기에서 이미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지 않았다면 황금사자기 최우수선수상 역시 팀 선배 유지홍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1981년, 박노준은 역시 이미 2학년 때 이영민 타격상을 차지한 초등학생시절부터의 동반자 김건우와 함께 3학년이 되었다. 거칠 것 없이 달려온, 그리고 여느 고교야구 스타들이 세 해 동안에도 다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미 첫 두 해 동안 모두 이루어버린 박노준이 그 해에 보여줄 활약에 팬들은 연초부터 들뜨고 있었다.
그것은 야구전문가로부터 동대문운동장 스탠드에서 소주병 한 손에 쥐고 웃통 벗어젖힌 채 '노준이 최고다'를 외치던 아저씨들을 거쳐, 하이틴 잡지 설문조사에서 전영록을 밀어내고 박노준이라는 이름을 1위에 올려놓았던 여고생에 이르기까지, 일치된 전망이고 기대였다.
그러나 전국 야구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모으며 나섰던 그 해 봉황기 결승전. 1회말에 박노준은 승기를 굳히는 석 점째를 만들기 위해 홈으로 파고들었고, 전날 내린 비로 축축해져있던 그라운드는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순간 그의 발목이 뒤로 꺾였고, 그의 몸은 홈플레이트에 채 닿지 못한 채 뒹굴었다. 복사뼈 두 개와 3각인대가 파열되는 치명적인 부상.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기어서 홈플레이트를 찍고 나서야 덕아웃으로 실려 들어갔고, 그 안에서 다시 경기에 나서겠다며 한참을 버틴 끝에야 병원으로 옮겨졌다.
석 점을 선취했던 선린상고는 박노준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진 허탈감에 실책을 연발하며 천적 경북고에 여섯 점을 헌납해 결국 4-6으로 무너졌고, 결승전 1회말에 실려나간 박노준에게는 '감투상'이 주어졌다.
그 날 저녁 6시부터 공중파 TV로 전국에 생중계되었던 박노준의 홈슬라이딩은 다시 시간마다 뉴스에서 되풀이되었고, 중계차는 한강병원으로 출동해 박노준의 부상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박노준이 입원한 209호 병실에는 봉황기를 차지한 경북고 선수단과 끝내 눈물겨운 석 점을 지켜내지 못한 선린상고 동료들을 시작으로 길고 긴 병문안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시절, 등굣길과 하굣길에 행운의 종이학을 접어들고 병원 문앞을 서성이던 여고생들이 지금은, 꽤나 자식들 잔소리에도 이력이 붙은 사십대 주부들이 되어 있으리라.
그 날 이후, 박노준은 비운의 스타, 혹은 비운의 천재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그 부상이 치명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선수생명을 끊어놓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박노준의 후반부 선수생활을 상징한 것이 그 날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비운의 스타, 비운의 야구인생
고려대로 진학한 박노준은 호적상 나이는 한 살이 적고 학번은 하나 높은, 그러나 실제로는 동갑내기였던 선동열과 한솥밥을 먹게 된다. 그러나 자잘한 부상 때문에 쉬는 날이 더 많았던 선동열의 몫까지 떠안느라 해마다 100이닝 가까이 공을 던져야 했고, 투수 등판에서 빠지는 날이면 외야수로 나서 방망이를 휘둘러야 했다. 그리고 대학 경기가 없을 때는 빠짐없이 국가대표로 불려나가 다시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투수와 타자의 겸업. 일찌감치 한 쪽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던 재능과 당장 한 경기의 승리가 절실했던 대학팀의 욕심. 그것이 서서히 야구선수 박노준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1986년, 프로야구 신인시장에 나선 박노준은 여전히 '관중 삼천 명을 몰고 다니는 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서울팀 청룡과의 신경전 끝에 박노준 지명권을 손에 넣은 OB 베어스는 '이미 어깨가 망가져 투수로는 쓸 수 없다'는 명분으로 몸값을 깎기 시작했고, 결국 '역대 타자 최고액'이라는 5천만 원으로 낙찰을 받게 된다.
하지만 당장 스프링캠프에서 그에게 떨어진 것은 '투타겸업'이라는 조치였고, 내심 투수에 미련이 있었던 박노준 역시 냉큼 지시를 받아들이고 만다. 그 때가 고교시절 보여주었던 재능을 프로무대로까지 이어갈 수 있었던 기회를 마지막으로 날린 순간일지도 모른다.
5승 7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3.25. 박노준이 프로무대에서 첫 해에 거둔 성적이었다. 어쩌면 신인 치고 무난한 것일 수도 있는, 그러나 '박노준'의 것으로서는 절망적인 성적이었다. 더구나 항상 그의 뒤에서 '2인자'로 불렸던 김건우와 성준이 각각 18승과 15승을 기록한 것에 비교하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성적이었다.
박노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여전했던 밖으로부터의 기대와 안으로부터의 욕심, 그리고 반드시 스스로 진가를 증명하겠다는 집념은 투타겸업이라는, 무지했던 선수관리 속에서 끊임없이 역효과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고스란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치명적인 병원 진료일지에 기록되었다.
87년 어깨부상, 88년 손등 뼈 골절, 89년 손가락 골절, 그리고 두 해 쉬고 92년 왼 무릎 인대 부상, 93년 갈비뼈 골절, 94년 허벅지 근육 파열, 다시 한 해 건너 96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 선천적으로 몸이 딱딱한 편이었던 그가 절대 그대로 사라질 수는 없다며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뛰고 구르고 몸을 날린 결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1994년은 그런 지루한 부상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거듭한 도전 끝에,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게서 '역시 박노준'이라는 찬사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던 해였다. 베어스에서 타이거즈를 거쳐 레이더스로 내쳐졌던 그는, 그 해 3할대 타율에 43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그 활약은 생애 첫 골든글러브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해 다시 근육 파열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하락세로 접어들었고, 두 해 뒤 무릎인대를 다친 뒤에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겨운 지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따금 대타로 나와 홈런을 날리고도 절룩거리며 힘겹게 그라운드를 도는 그를 보며, 옛 팬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는 물기어린 박수를 보냈다. 재도 남지 않게 완전히 타버린 한 야구선수의 뒷모습이 주는 감동이었다.
'오빠부대'라는 문화현상을 창조했던 정점의 사나이. 그가 걸어왔던 열 두 해의 거칠고 험했던 프로생활. 끊임없이 부러지고 끊어지며 절망을 재촉했던 운명 앞에서도, 그리고 오히려 짐이 되어 자신을 비웃는 화려한 과거 앞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완주해주었던 근성의 사나이. 내가 기억하는 박노준이 여기까지다.
그 뒤 9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박노준은 지도자로서 재평가받겠다는 각오로 마이너리그에서 지도자수업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사라진 팀 레이더스에서 은퇴한 그가 마땅한 코치 자리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 때 그에게 열린 새로운 길이 해설가였고, 그는 선수시절의 아쉬움과 지도자로서의 꿈을 담은 기술적 설명 중심으로 야구해설에 또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해설이 거북하다. 내 마음 속의 비장한 영웅 '독일병정'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매번 낯설다.
그러나 나는 그의 해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우리 야구사에서도 흔치 않았을 아찔한 성공과 깊은 좌절, 그리고 그것과 포기하지 않고 맞서왔던 이십여 년 야구인생의 내공이 언젠가 지도자로서 성공하고 인정받는데 쓰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오늘 아침에 본 뉴스인데 박노준선수의 기량은 천부적인 소질과 노력으로 고교무대에서 꽃 피웠으나 정작 대미를 장식해야될 프로에서는 이미 만신창이 된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말로 가슴 찡한 인생 스포츠 스토리를 읽었습니다. ㅠ.ㅠ
옛날 선린상고, 천안 북일고, 경북고 그리고 광주일고의 경기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하일라이트 스포츠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예전의 인기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싶은 것은 아직도 어린 선수들이 팀의 승리를 위해 혹사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2의 박노준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 방법과 무리한 경기 출전은 가급적 피해야될 것입니다. 나의 블로그를 통해 박노준선수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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